사람과 사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사람과 사람
운동삼매경에 빠졌던 악동시절
국제특공무술연합회 박노원 회장(1)
기사입력: 2012/07/04 [17:48] 최종편집: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특공무술 하나에 평생을 바친 이가 있다. 지난 40여년간 각종 무예를 섭렵하며, 특공무술 하나만을 바라봤던 박노원 회장. 그가 수많은 시기와 모함에도 불구하고, 특공무술을 현 위치에까지 끌어올리며 존경받는 특공무술 단체의 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 무예대가의 굴곡 많았던 인생사를 들어봤다.   
 
나는 지난 1956년 4월. 전북 익산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2남 2녀중 장남으로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당시 우리 집은 총 12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농사철에는 농사를, 그 외 시간에는 중고 가전제품을 판매했고,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침을 놓았다. 삼촌과 고모들은 앙고라토끼 200마리 등 가축들을 길렀다. 전쟁 직후라, 모두들 먹고 살기 힘든 때였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세계 중심에 우뚝 서라는 의미로 노원(魯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릴 때부터 당수도 등을 익힌 삼촌들을 따라 운동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이 덕분이었는지 크게 한번 아파본 적도 없었다. 몸이 날렵해, 자연스럽게 골목대장이 됐다. 친구들은 모두 내가 싸움을 잘 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상대가 공격하기 전에 먼저 치고 빠지니 적수가 없었다.

장난꾸러기 악동으로 나름의 명성을 쌓던 어느 날, 한번은 전깃줄을 가지고 놀다 크게 감전된 일이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장대로 나를 전깃줄에서 떼어냈다. 조금만 늦었어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겠지만, 이때만 해도 죽는다는 생각 보다 내 몸이 뜨겁다고만 느껴졌다. 그때가 내 인생 첫 번째 위기였다.

이즈음, 시골에서는 보름 때마다 쥐불놀이가 성행했다. 쥐불놀이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옆 마을과의 대규모 싸움이 벌어졌다. 보통 20대 20여명이 붙었다. 어릴 때는 후미에서 공격 지원조에 가담했다. 몇 번이나 상대편에 잡혔지만 너무 어리다며 놓아주곤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후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최전방에서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 

공방은 매번 치열했다. 불 깡통은 물론 심지어는 돌까지 던졌다. 아이들이 다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자, 가끔은 어른싸움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옆 동네와의 싸움은 연례행사처럼 매년 이어졌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이때는 싸우고 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1963년 집에서 30미터 거리의 흥왕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란히 초등학교 앞에서 이발관과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불량식품도 팔고, 학용품도 팔던 가게였는데, 창피한 생각이 들곤 했다. 덕분에, 귀한 달걀을 하루에 2개씩 먹을 수 있었다.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다. 성적표에는 ‘수’나 ‘우’가 대부분이었다. 운동 역시 잘했다. 삼촌들을 따라서 운동을 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매일 뛰어놀다보니 운동은 잘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특별활동으로 덤브링부에 가입해 체육대회에서 시범을 보이곤 했다. 운동회가 열리면 항상 1등을 하곤 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경기도 평택으로 이사를 갔다가, 할아버지의 호출로 다시 시골로 내려왔다. 이때 친구들은 서울 물을 먹고 왔다며 나를 대우해줬다. 사실 서울은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서울로 생각했다.

 
중학교는 익산에 이리중학교에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장학금을 받고 오전 수업 이후에는 운동으로 하루를 보냈다. 주로 육상과 높이뛰기 연습에 구슬땀을 흘렸다. 이때, 중학교 앞에는 태권도장만 7~8개가 문을 열고 여는 등 체육관들이 많이 있었다. 태권도를 시작으로, 우슈와 복싱, 합기도, 유도, 육체미 등을 배웠다. 힘들기보다는 재미있었다.

고등학교는 익산에 위치한 원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운동 특기장학생으로 가려고 했지만, 일반 학생으로 진학했다. 공부는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육상부에 가입했다. 전국대회에 나갈 전북 대표 선발전에 나가곤 했지만 입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태권도나 합기도에는 스스로 귀재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때 운동을 하다보면 싸움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어린 마음에 칼에 찔릴 것을 대비해 요가를 배웠다. 창자를 위나 좌우로 모는 훈련을 하기 위함이었다. 요가는 무예를 익히는 데 있어 일종의 연장선이었다. 운동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아니 자면서도 했다고 봐야할 정도였다. 식사할 때 무릎이 구부러질까봐 펴고 먹다 혼이 나는 일이 잦았다. 이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나는 무작정 서울행을 택했다. 한번뿐인 인생,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판단한 이유다.                                   <다음호에 계속>
 
 
무예신문 (http://mooye.net/) 
윤영진 기자 윤영진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 무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김영수 12/08/07 [16:37] 수정 삭제  
  악착 같이 운동을 하더니 결국 자랑스런 특공무술 창시자가 되어 자랑스럽습니다.옆에서 지켜 보는 입장이지만 정도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술과 담배 안하고 바른 생활을 하는 무도인 박노원 회장 대기만성이라고 박수를 보냅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관련기사목록
[박노원] [영상] 박노원 총재 “특공무술, 일반인 위한 특공무예로 바꾸다” 조준우 기자 2019/03/04/
[박노원] 특공무술 박노원 총재, 특공무예로 새롭게 비상하다 조준우 기자 2019/03/04/
[박노원]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삼은 특공무술 전도사 윤영진 기자 2012/08/30/
[박노원] 특공무술 창시자가 되기까지 윤영진 기자 2012/08/03/
[박노원] 운동삼매경에 빠졌던 악동시절 윤영진 기자 2012/07/04/
[박노원] "가시적 부분 아닌 내실 다지는데 힘 쏟아야" 무예신문 2011/12/29/
[박노원] "결실 맺을 수 있도록 단합 이뤄내야" 무예신문 2009/12/31/
가장 많이 읽은 기사
소녀시대 태연, 종로에서 오고무? / 최하나 기자
‘UFC’ 강경호 쾌조의 2연승, 브랜든 데이비스 이겨 / 조준우 기자
문체부, 전통무예 진흥 기본계획 발표… ‘전통무예의날’ 지정 / 장민호 기자
세계무예마스터십 차기대회 개최지, 유치경쟁 ‘치열’ / 조준우 기자
대한체육회. “체육회-KOC 분리 말도 안돼” 강력 반발 / 장민호 기자
산딸나무, 껍질ㆍ잎ㆍ열매 효능 다 달라 / 대전 임헌선 기자
명불허전 파울로 코스타, 13전 전승 이어가 / 조준우 기자
으름나무 열매의 효능 / 대전 임헌선 기자
2019 월드태권도 월드컵 품새챔피언십, 대만ㆍ미국 강세 / 장민호 기자
무예를 통해 자신감을 얻다! ‘제3회 무예 열린학교 프로젝트’ 성료 / 최현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