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910년대는 무단통치시기로 식민지적 체육이 구조화되었다. 특히 1944년은 2차 세계대전 말기로 한국인이 5인 이상 모일 경우에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모임이 가능하였다. 또한 젊은 층은 청년의 징용과 처녀의 정신대 징발을 피할 수 없었다. 초, 중, 고등학생들도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준비를 해야 하는 등 사회적인 긴장이 극도에 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통치로부터 해방이 됨에 따라 곤란한 입장에 놓인 친일파들과 무능한 정치로 인하여 치안이 불안정하였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져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마찰이 심화되었던 시기였다. 사회적 불안정이 팽배해지자 사람들은 자연히 자신의 호신(護身)과 정의,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는 무도의 수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태권도 초창기에 창설된 관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청도관 한국의 태권도도장의 발생으로는 1944년 옥천동 영신학교강당에서 조선총독부 아베총독과 친분이 있는 이원국이 당수도를 가르쳤다는 설로 시작된다. 이원국은 1946년(당시35세) 서대문 영천에 시천교당(현재의 대신고교 근처)에 ‘당수도 청도관’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후배를 육성한 것이 청도관의 시초라 하겠다. 이원국은 1907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일본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유학하면서 동경의 가라테쇼또깡(空手道松濤館)의 후나고시(船越義珍)로부터 가라테(空手)를 배웠으며, 해방 후 청도관(靑濤館)을 창설하였다. 초창기에 많은 제자(손덕성, 엄운규, 남태희, 백준기, 우종림, 고재천, 이용우 등)들을 배출하였고, 미국에서 거주하다 2003년 2월 2일에 워싱턴 알링턴병원에서 97세로 별세하였다. 청도관의 분관으로 인천 강서종의 국무관(國武館), 서대문 이용우의 정도관(正道館), 광주 고재천의 청룡관(靑龍館)이 있으며, 최홍희의 군(軍)을 중심으로 한 오도관(吾道館)이 있다. 송무관 가라테쇼또깡(空手道松濤館) 창설자 후나고시(船越義珍)로부터 이원국과 같이 사사(師事)받은 노병직은 해방 후 경기도 개성시 자남동의 관덕정(觀德亭) 궁시장(弓矢場)에 ‘공수도 송무관(松武館)’을 개설하였고, 1946년 개성시 동흥동에 ‘당수도 송무관’을 개관하였다. 노병직(1919년생)은 제자로 이영섭, 강원식, 조규장, 송태학, 김일상 등을 배출하였고, 현재에도 미국 미네소타에 거주하며 건강하시다. 지도관 전상섭(1917년생 추정)은 일본유학시절 마부니(摩文仁賢和)로부터 가라테를 배웠고,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유도학교 조선연무관에서 유도와 가라테를 가르치던 중 해방 후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로 출발하였다. 전상섭이 6.25동란시 행방불명되자 지도사범 윤쾌병이 부산 피난시절 지도관(智道館)으로 개칭하였다. 지도관 출신은 배영기, 이종우, 김복남, 정진영, 이교윤, 이병로 등이다. 지도관 분관은 이교윤의 한무관(韓武館)이 있다. 무덕관 황기(1914-2002)는 1935년 남만주 철도국에 근무 중 국술을 수련하였다 한다. 해방 후 서울 용산역 부근 철도국에서 ‘운수부우회 당수도부’로 출발하여 무덕관(武德館)이 되었다. 당시 수련생은 김운창, 홍종수, 최희석, 김인석, 정창영, 이강익 등이며, 철도국을 중심으로 전국에 번창하였다. 무덕관은 1960년 대한수박도협회로 서울시교육청에 등록하여 독자적으로 나가는 황기를 1965년 김영택과 홍종수가 무덕관에서 제명하고, 각 관의 통합에 동참하였다. 창무관 윤병인(1918년생 추정)은 어린 시절에 만주에서 중국무술 ‘주안파’를 수련하고, 해방 전 일본유학중에 가라테의 대가인 도오야마(遠山寬賢)로부터 가라테 5단이 되었다. 해방 후 경성농업학교의 체육교사로 무도를 가르치던 윤병인은 1946년 서울 종로 YMCA에‘YMCA권법부’를 창설하였다. 윤병인은 6.25동란 중에 행방불명이 되어 이남석, 김순배가 창무관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YMCA권법부 출신으로는 이남석, 김선구, 홍정표, 박철희, 김순배 등이다. 분관으로 홍정표, 박철희가 서울 신설동에 강덕원(講德院)을 개관하였다. 당시 북한에도 한영철이 태권도를 지도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무도의 개념 이들 관 창시자들은 중국의 권법과 일본 공수도의 서로 다른 요소를 제거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새로운 기술을 창안하였던 것이며, 무도를 연마함으로써 강인한 체력과 수준 높은 손발의 공격 방어기술 그리고 정신수양을 하고, 이를 통하여 정의롭고 훌륭한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교육적인 가치를 중요시하였다. 일반인들은 태권도의 놀라운 파괴력과 유연하고 민첩한 공격 방어의 기술에 감탄하였으며, 무도로써의 가르침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데 가능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태권도가 무도로써 정착되도록 하여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도는 살상의 기술이나 상대를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자연과 신체를 유사하게 보며 무도 수련을 통하여 자아실현을 하는 철학적, 도덕적, 윤리적인 정신교육에 중점을 두는데 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무도를 하나의 문화영역으로 보는 견해는 그 역사에서 고대와 중세의 무도는 실전의 장에서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이었으나, 실전을 떠나서는 예의, 오락, 축원, 훈련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행해졌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태권도가 한국의 문화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게 된 이유는 무도라는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임을 태권도지도자가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무예신문 (http://mooye.net/) <저작권자 ⓒ 무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