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의 역사는 삼국시대 고구려 벽화와 신라의 화랑이야기로 시작하여 고려시대의 태권도, 조선시대의 태권도 그리고 근대와 현대의 한국고유의 태권도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라 할 수 없으며, 격투기술로서의 맥을 같이할 뿐 역사적으로 연결된 부분은 없다. 이러한 태권도의 역사기록은 태권도관련 공식기관에서 잘못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은폐하고 왜곡하기보다는 사실을 정확히 밝혀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태권도 역사를 바로 고쳐 저야 한다. 이를 위한 연구가 늦게 국기원을 중심으로 시도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에서 발생된 태권도가 1945년 전 일본유학을 한 사람들이 가라데를 배워 와서 한국적인 새로운 형태로 태권도를 지도하였으며, 동양무술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무예를 만들어 낸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가라데(空手道)와의 관련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필자는 그동안 연구되어진 태권도역사를 중심으로 기술하고자한다. 최초의 무술형은 군(軍)의 전투에만 사용되었지만 현대에 와서 무예로 알려진 몇 가지 유형들은 스포츠, 체육, 미학, 자기방어의 방법으로 세계 전역에서 실행되고 있다. 무예는 목적, 기술, 방법의 면에서는 무술과 다르지만, 기초가 되는 본질적인 무술의 기풍은 남아있다. 지금의 태권도가 고대에서부터 전수되어온 격투기술로서 맥을 같이 한다면 격투기술은 인간의 생존경쟁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으며, 인간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체계적으로 구체화되어 자연과 인간사회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서 격투기술의 경험을 변형하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1945년 전후로 발생되어 오늘의 태권도로 사용되었든 당수도 공수도 권법 가라데 수박도...등의 명칭을 중심으로 그 역사적 사실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가라데(공수도)와 태권도의 관련사실을 분명하게 1. 2. 회에서 밝히고자 한다. 먼저 중국의 당(唐:618-907)나라 시대에 시행되었든 격투기술은 어떤 것이 있었나 보아야 할 것이며, 이것을 본받아 오키나와에서 새로운 형태의 무예로 어떻게 발전을 시켰나를 알아야하며, 조선의 영향은 없었는가를 연구하여야할 것이다. 일본인들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인 화하는데 익숙한 민족으로 생각된다. 오키나와제도가 일본영토에 편입된 것은 19세기말엽에 이르러서이며, 그 이전까지는 해상왕국으로 존재하였다. 역사가 오랜 중국에 있어 무술의 창시자는 황제(黃帝)로 되어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의 격투기는 주먹이나 발을 사용하여 때리고, 치고, 차는 권술(拳術), 상대의 급소를 쥐어 아프게 하는 금나술(擒拿術), 유도나 씨름과 비슷한 솔각(率角) 등의 형태로 고대에서부터 있어왔다. 6세기 초에는 달마(達摩)가 하남성의 소림사에 머물면서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을 지어 유약한 승려들의 심신을 단련시켰다고 전한다.(이진수:易筋經1987) 이러한 격투기는 인간이 생존 수단으로 발생되었고 존속되어진 것이다. 당(唐)왕조는 중국 중세에 강력한 중앙정부의 위력을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까지 확장하고, 불교문화의 융성한 시대를 열었다. 또한 주변 국가들에 대하여는 종주권을 강요하는 중국 중세문명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중 측천무후(則天武后623-705)는 무자비한 전제군주로 15년 동안 통치하고, 그 뒤의 통치자들도 왕조의 안녕을 위한 지배를 아시아 전 지역과 인도에 이르는 지역까지 통제하게 되었는데 그에 따른 군사력(무사)의 위력이 강하였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의 무술이 조선을 통하여 오키나와에 전래되었는지는 흥미 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과 유구의 연구 등에서의 남방문화연구를 통하여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 광해군시대 허균은 홍길동전의 마무리를 율도국이라는 지상낙원국가로 세웠고, 율도국은 유구(琉球:오키나와)국을 의미하며, 오키나와는 조선과의 교류로 조선시대 문화의 영향이 아주 크게 미친 지역이었다. 특히 유구인의 솔직한 기질과 의리는 당시 국제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고 하였다.(秋山謙藏:1930) '명종실록'1년 2월 무자. 전체적으로 유구의 국민성은 謹厚하고 예의를 잘 갖추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서 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조선으로부터 후대를 받았다고 한다. 조선과 오키나와 관계 중 빈번한 피로(被虜)인, 표류민의 형태로 상당수가 왕래하였으며, 조선과 통교 무역의 기회증가 또는 안보측면에서 유대를 강화하려는 오키나와 왕국과 교류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무사들에게 무술지도를 어떻게 하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중국의 당수가 오키나와 전래와 무도의 개념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무예신문 (http://mooye.net/) <저작권자 ⓒ 무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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